[KBO LEGEND] KBO리그 최초 100승 투수, ‘위대한 투수’ 삼성 라이온즈 김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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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이후 다섯 시즌동안 평균 220이닝을 던지며 20승씩을 챙겨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통산 100승을 달성한 투수.

 

특히 그 사이에 두 차례나 선발 20승을 기록했던 역사상 유일한 투수이며, 김수경과 조용준을 비롯한 수많은 대투수와 신인왕을 길러낸 당대 최고의 투수 지도자 김시진.

 

그러나 김시진이라는 이름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최고의’, 혹은 ‘위대한’ 같은 수식어가 아니다. ‘비운’이나 ‘2인자’, 혹은 ‘3인자’니 하는 비루한 꼬리표들이다.

 

사진|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100승 투수 삼성 라이온즈 김시진 (출처.삼성 라이온즈)

 

그렇다. 그의 이름은 자연스레 최동원이라는 이름을 연상시키고, 그것은 또다시 선동열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불러온다. 그리고 그런 연상의 출발점은 아마도 1981년 실업야구 코리안 시리즈였을 것이다(프로야구가 개막하기 전, 실업야구도 전기리그 우승팀과 후기리그 우승팀이 7전 4선승제의 코리안 시리즈를 통해 통합 우승팀을 가렸다).

 

항상 그 앞에 서 있던 라이벌, 최동원

물론 경남고 2학년 때 당대 최강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등장해 이듬해에는 청룡기 승자 결승에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를 상대로 20탈삼진을 기록하며 파란을 일으킨 동급생 최동원에게 진작부터 한 발 밀리던 출발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대회에서 MVP 대신 감투상을 받아 모으며 내공을 다진 김시진을 사람들은 군산상고 에이스 김용남까지 묶어서 ‘개띠 삼총사’라고 불렀고, 고교 시절 반 발쯤 앞서가던 김용남의 성장이 정체하기 시작한 대학 시절부터는 본격적으로 최동원과 라이벌로 묶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뭔가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대학 졸업반이던 1980년이었다. 그 해 한·미대학선수권대회 대표로 선발된 김시진은 1차전에 선발 출장해 6이닝 동안 삼진 8개를 잡아내며 무실점으로 승리를 잡아냈지만, 3차전 경기 시작 직전 워밍업 피칭을 하다가 갑작스러운 어깨 부상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부상은 결정적으로 김시진의 행로를 ‘꼬아놓고’ 말았다. 이듬해 대학을 졸업한 최동원은 사상 최고액인 계약금 3,000만 원에 더해 아버지를 부장급으로 채용해 준다는 조건까지 붙여 실업팀 롯데와 계약을 했다.

 

그러나 진작에 ‘최동원과 동급’의 조건을 약속했던 포항제철이 어깨 부상 소식을 듣자마자 낯빛을 바꾸며 절반을 잘라낸 ‘1,500만 원’이라는 조건을 김시진 앞에 던져놓았던 것이다.

 

도저히 자존심을 숙일 수 없었던 김시진은 포항제철 입단을 포기하고 그대로 군 입대를 택했고, 그 때문에 이듬해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군인 신분으로 참가한 김시진과 장효조, 정구선 등은 우승하고도 최동원과 달리 병역혜택을 받지 못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당시 대기업 사원의 15년 치 연봉에 해당했던 거액을 계약금으로 받아 들고 영웅 대접받으며 실업팀 롯데에서 뛰었던 최동원, 그리고 무너진 자존심을 지키느라 일찌감치 군복을 입어야 했던 김시진이 맞대결을 했던 것이 바로 그 해 한국 야구의 최정상에 차려진 무대였던 실업야구 ‘코리안 시리즈’였다.

 

사진|당대 최고의 라이벌로 손꼽히던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왼쪽)과 삼성 라이온즈 김시진(오른쪽) (출처.유튜브 사담기)

 

최동원이 전기리그에서만 12승을 올린 롯데가 전기리그를 우승했고(팀 당 경기수가 전·후기 각각 18경기였다), 김시진과 장효조가 투·타의 균형을 이룬 육군 경리단이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 두 팀은 10월 25일부터 31일까지 코리안 시리즈를 치러 진정한 그 해의 왕자를 가려야 했다. 7일 동안 매일 한 경기씩 일곱 경기를 치르는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그 해 1차전 양 팀의 선발은 물론 최동원과 김시진이었다. 두 선수는 등장하자마자 이미 각 팀에서 권영호(경리단), 남우식(롯데) 같은 선배들을 밀어내고 에이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젊은 에이스들은 그날 함께 완투를 하며 맞섰다. 그러나 승리는 단 2안타 만을 내주며 끝내 무실점으로 버틴 김시진의 것이었다. 그 둘의 운명적인 맞대결의 첫 장은 김시진의 승리로 시작되었다.

 

다음날 2차전에서도 롯데 박영길 감독은 1회에 5점을 빼앗기자 전날 완투한 최동원을 2회부터 투입했고, 그다음 날인 3차전에서도 5회까지 4-4 동점 상황이 이어지자 다시 최동원을 내세웠다. 그러나 에이스 최동원을 3일 연속 등판시키는 무리에도 불구하고 롯데가 거둔 성적은 1무 2패.

 

심지어는 비 때문에 하루를 건너 이어진 4차전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나온 경리단의 선발 김시진이 마주한 것은 또다시 최동원이었고, 나란히 7회까지 맞대결하며 만들어낸 점수는 3-1 경리단 우세였다. 우승은 당연히 경리단의 것으로 굳어가는 듯했다.

 

김시진이 한 발 앞섰던 1981년 실업야구 코리안 시리즈

그러나 그 때나 그 뒤로나 고분고분 패배를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던 최동원의 투혼이 만들어낸 마술은 그 순간에 시작되었다. 7회 초 2사 후에 연속으로 두 개의 볼넷을 허용하며 피곤한 기색을 보인 김시진을 구원 등판한 권영호를 상대로 롯데 타선이 6점을 뽑아내며 역전을 성공시켰다.

 

승기를 잡자 잠시 마운드를 내려와 1루 수비를 보며 한숨 돌린 최동원은 구원 투수 차준섭이 8회 말 2사 후에 만루를 허용하며 흔들리자 다시 마운드로 돌아와 네 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아내 스스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말하자면 한 경기에서 한 명의 투수가 선발승과 세이브를 동시에 따내는 진풍경을 연출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세를 되찾은 롯데는 계속 이어진 5차전을 이해창과 정현발의 홈런으로 잡은데 이어 6차전에 다시 등판한 김시진을 두들겨 6점을 뽑아내며 역전 우승을 얻어냈다.

 

그 마지막 6차전 롯데의 완투승 투수 역시 최동원이었다. 그리고 비 때문에 취소된 한 경기를 제외한 코리안 시리즈 여섯 경기에 모두 등판해 세 번의 승리와 한 번의 무승부를 이끌어낸 최동원은 만장일치로 MVP를 차지하고야 말았다.

 

일주일 동안 매일 등판해 공을 던지며 이미 기울었던 승부를 뒤집어낼 수 있는 투수. 그것은 우리 야구사를 통해 결코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존재이며, 김시진의 유일한 불운은 바로 그 투수와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이 야구를 했던 선수들 중에 가장 뛰어난 투수였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한 발 앞서 가지만 이내 따라 잡히고 처절하게 무너지며 역전 주자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들러리로 전락하기. 그것이 김시진의 운명이었다.

 

다시 한번 무릎 꿇은 김시진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거쳐 1983년, 두 대투수가 프로 무대에 등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먼저 한 발 앞서나간 것은 김시진이었다.

 

경리단 복무를 마친 뒤 1983년 1차 1순위 지명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 김시진이미 한 해 전인 1982년 이선희와 황규봉, 권영호의 15승 트리오를 구축한 삼성이었지만 김시진은 데뷔 첫 해 229.1이닝을 던지며 2.55의 평균자책점으로 17승을 기록하며 에이스 자리를 물려받았다.

 

사진|삼성 라이온즈 입단 초기의 김시진 (출처.삼성 라이온즈)

 

반면 같이 데뷔한 최동원은 그 해 꼴찌로 처져있던 팀 롯데 자이언츠에서 혼자 16번이나 완투하는 노고에도 불구하고 9승을 건지는 데 그쳤을 뿐 아니라, 그 해 6월 7일 김시진과의 맞대결에서도 5-0으로 완투패를 당하며 기대를 감당하지 못하는 듯 했다(물론 그 해는 김시진의 팀 삼성도 강팀은 아니었다. 꼴찌 롯데에 겨우 3경기 차 앞선 4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투수가 모두 프로 적응을 끝낸 1984년. 어김없이 역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 해에도 김시진은 한 걸음 더 성장한 모습을 보이며 19승을 올려 삼성의 전기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 해 전반기까지만 해도 9승에 머물러 있던 최동원이 후반기 들어 팀의 50경기 중 무려 31경기에 등판하는 무리 속에서 18승을 보태는 현기증 나는 페이스로 롯데의 후기리그 우승을 만들어내며 시즌 27승으로 넉넉히 김시진의 승수를 추월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운명의 한국시리즈가 시작되었고 마치 누군가 미리 써두었던 시나리오처럼, 오히려 영화였다면 억지스러웠을 드라마가 그라운드에서 연출되고 말았다.

 

사실 롯데의 후기리그 우승은 그 자체가 삼성 김영덕 감독이 짜놓은 각본의 일부일 뿐이었다. 2년 전 원년 한국시리즈에서 객관적 전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OB 베어스에 역전패당하며 우승을 놓쳤던 삼성은 전기리그 우승으로 한국시리즈 출전권을 따놓은 후기리그에 ‘고의 패배’를 불사하며 전·후기 통합 승률 1위의 팀이었던 OB를 탈락시켰고, 전기리그에서 삼성에게 1승 9패로 몰렸던 만만했던 팀 롯데를 상대로 간택해 두었던 것이다(그 해 롯데는 최동원을 제외하고 단 한 명의 10승대 투수도 가지고 있지 못했고, 삼성은 정규시즌에서 그 최동원을 상대로 4승을 빼앗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마음속으로 ‘설욕’을 별렀을 그 또 한 번의 한국시리즈에서 김시진은 홍문종의 타구에 발목을 맞고 부상을 당하는 불운까지 곁들이며 2패를 떠안았고, 최동원은 또다시 2년 전 못지않은 투혼과 상식 밖의 내구력을 과시하며 4번의 완투를 포함해 5경기에 나서 4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 영웅이 되었다.

 

사진|홍문종의 타구에 맞고 복숭아뼈 부상을 당한 김시진 (출처.MLB PARK)

 

모두의 예상과 계산을 뛰어넘은 투구였고 우승이었다. 1984년은 정규시즌 27승에 이어 한국시리즈 4승을 독식한 최동원을 위한 해였고, 그 반대편의 가장 짙은 그늘 속에 가려진 것이 김시진이었다.

 

또 하나의 장벽, ‘0점대 평균자책점’ 선동열

이듬해도, 그 이듬해도 최동원은 최고였다. 1985년과 1986년에 각각 20승과 19승을 기록했고, 해마다 200이닝을 훌쩍 넘겨 던지면서도 1점대 평균자책점을 유지하는 강인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승부의 열기에 중독되어 최동원이 달려온 길은 강철이라도 삭혀버릴 만큼 무모한 것이었고, 최동원도 나이 서른 줄에 들어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조금씩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선수 생활의 막바지에는 최동원과 달리 김일융이라는 또 한 명의 대투수와 짐을 나눠지고 달려왔던 김시진의 걸음걸이가 좀 더 나았다.

 

사진|1985년 김시진의 투구 모습 (출처.MLB PARK)

 

김시진은 1985년 25번 승리와 탈삼진, 승률에서도 최고 순위에 오르는 대활약으로 삼성의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끌었고, 16승을 했던 1986년을 거쳐 5년 차인 1987년에는 또다시 23승을 기록하며 두 번째 다승왕 타이틀과 함께 데뷔 5년 만에 통산 100승을 채워냈다.

 

바로 그 해부터 갑자기 페이스가 떨어지기 시작한 최동원보다 한 발 앞서 오른 고지였고, 어쩌면 최동원과의 경쟁에서 처음으로 얻은 의미 있는 승리이기도 했다.

 

사진|꾸준한 활약으로 오랜 시간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로 군림한 김시진 (출처.삼성 라이온즈)

 

빨리 달리지는 못했지만 더 오래, 더 멀리 달린 최후의 승자. 김시진의 앞에는 그런 영예가 기다리는 듯도 했다. 해마다 20승을 기본으로 아는 듯 마주 달리던 둘 중에서 최동원이 갑자기 14승과 7승으로 처지기 시작했을 때, 더 이상 김시진의 앞으로 나설 수 있는 투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최동원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무너져도 김시진에게 ‘최고’의 자리는 허락되지 않았다.

 

항상 ‘최고’였던 최동원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거듭했던 무리의 후유증, 그리고 팍팍했던 시대와 충돌하며 밀려가기 시작할 무렵 나타나 힘으로 맞대결하며 최동원을 딛고 올라선 또 다른 전설적인 투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 투수의 이름은 선동열이었다.

 

삼성은 1986년과 1987년에도 한국시리즈에 올랐고, 에이스는 여전히 김시진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가 달랐다. 이번에 상대해야 할 팀은 해태 타이거즈였고, 그 팀의 선봉은 경기당 한 점도 채 주지 않는 완벽한 에이스 선동열이었다.

 

그리고 김시진은 그 앞에서 다시 1986년에 세 번, 1987년에 두 번 패배했고, 한국시리즈를 포함한 포스트시즌에서 통산 무승 9패, 한국시리즈에서는 무승 7패 32실점이라는 치욕적인 ‘역대 최고 기록’ 만을 남겨놓고 말았다.

 

정규리그에서는 통산 124승을 올리며 승승장구했지만, 이처럼 큰 경기에서 약하다는 이유로 ‘새가슴’이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던 투수 김시진. 하지만 데뷔 후 5년간 무려 1,104이닝이나 던진 당대로 봐도 꾸준한 이닝이터였으며, 1985년 통합 우승의 주축이자 수년간 삼성의 에이스 역할을 한 투수이자 80년대를 대표하는 투수가 바로 김시진이다.

 

그리고 1988년 말, 롯데와 삼성이 최동원과 김시진을(그리고 김용철과 장효조를) 맞바꾸기로 했다는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진다.

 

선수협회를 만들어 저항한 최동원을 응징하려는 롯데와 우승을 위해 ‘한국시리즈용 에이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두 구단의 이해가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트레이드 이후 최동원은 2년간 7승, 김시진은 4년간 13승을 이력에 겨우 더했을 뿐이다.

 

사진|최동원의 반대급부로 트레이드되며 삼성 라이온즈에서 롯데 자이언츠로 팀을 옮긴 김시진 (출처.롯데 자이언츠)

 

그 사이 다섯 살이 어렸던 선동열은 1986년부터 2년 연속으로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세계적인 사건을 저질렀고 1989년부터 3년 연속으로 투수 3관왕(다승 · 평균자책점 · 승률)을 독식하며 단숨에 ‘최고’의 자리로 올라섰다.

 

그리고 1990년 9월 5일에는 최동원을 넘어 1,020개째 탈삼진을, 1992년 4월 11일에는 김시진을 넘어 통산 125번째 승리를 기록하며 ‘최고’를 다투던 두 선배를 한꺼번에 역사의 뒷장으로 넘겨버렸다.

 

프로야구가 ‘비즈니스’라기보다는 ‘지역대항 체육대회’로 받아들여졌던, 그래서 고향 팀에서 내보내지는 것을 ‘호적을 파내는’ 일만큼이나 무섭게 여겼던 그 시절, 그렇게 뿌리 깊은 두 그루의 거목을 뽑아내 결정적으로 시들게 하지 않았다면 선동열과 최동원, 김시진의 신·구 에이스 대결이 몇 해는 더 흥미롭게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보다 싱겁게 세대교체는 끝이 났고, 선동열은 그 뒤로 무료할 만큼 압도적으로 최고의 자리를 독주했다.

 

김시진은 ‘위대한 투수’ 일뿐이다

흔히 말하듯 김시진은 상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없었고, 당대 최고의 강속구나 명품 구질을 가지지도 못했다. 그리고 꼭 필요한 순간이라면 몇 경기라도 연투하며 버텨낼 수 있는 체력과 내구력도 없었고, 큰 경기에서 평소 실력 이상으로 불타오르는 대범함과 근성도 없었다. 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김시진에게 따라붙은 그 모든 아쉬운 평가들은 오로지 최동원, 그리고 선동열이라는 존재와의 비교일 때에만 옳다. 그리고 그 외의 경우라면 옳지 않다.

 

김시진은 5년 만에 100승을 기록할 만큼 강했고 꾸준했으며, 선동열과 최동원이 아니라면 그 누구와의 맞대결에서도 밀리지 않는 압도적인 투수였음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구석에서건,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은 믿지 못할 만한 전설 같은 사연 한두 개는 있기 마련이다. 야구에서라면 최동원과 선동열이 그런 존재들이다.

 

그저 세상 일이 때로는 그런 것이고, 굳이 그들을 비교의 준거로 삼아 다른 모든 놀라운 일들을 비웃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것에 다소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다들 ‘비운의 두뇌’인 것도, 모차르트의 것에 다소 부족하다 해서 ‘저주받은 영감’인 것도 아니듯이 말이다.

 

김시진은, 그가 스스로 가만히 앉아 최동원과 선동열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를 제외하면, ‘비운’도 ‘3인자’도 아닌, ‘위대한 투수’ 일뿐이다.

 

표|김시진의 통산 투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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