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LEGEND] 한국 프로야구 영원한 에이스, ‘불사조’ OB 베어스 박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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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프로야구 마이너리그 출신으로 한국 프로야구 원년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팀의 우승은 물론 투수 3관왕, 그리고 초대 MVP까지 휩쓸었던 당대 최고의 투수 박철순.

 

물론 원년의 맹활약에 이어 그 이후의 프로 생활은 부상과 재기의 연속으로 힘겨운 선수 생활을 거듭하면서 최고의 선수라기보다는 ‘불사조’라는 이미지가 더 어울리게 된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

 

박철순은 1982년 이전에도 순탄한 인생을 보낸 적이 없었을 만큼 격랑의 인생을 보냈던 선수였다. OB 베어스 입단 이전의 박철순의 행보를 다시 되돌려보자.

 

파란만장 인생사 박철순

박철순의 고향은 부산이다. 부산에서 초등학교 시절, 뒤에 롯데 감독이 되는 김용희 해설위원과 선수 생활을 함께 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용희가 고려대 74학번이므로 박철순도 74학번이 되어야 하지만 박철순은 연세대 75학번이다. 고교를 무수히 옮겨 다니는 중에 1년의 유급을 겪었기 때문이다.

 

박철순은 부산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이런저런 트러블로 학교를 더 이상 다니지 못하게 된다. 이때 아예 부산을 떠나버렸던 박철순이 정착한 곳은 대전이었다. 대전의 신생 야구팀인 대성고등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하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하지만 대성고 야구부에 크나큰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지역 예선 대전고등학교와의 시합에서 대성고는 3학년 에이스였던 정성만의 역투로 승리를 눈앞에 두었으나 8회 이후 석연치 않은 심판 판정으로 역전패했고 격분한 대성고 야구부원들이 심판을 집단으로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용서받지 못할 불상사로 대성고 야구부는 중징계를 받아 야구부가 해체되고 당시 2학년 백업 투수로 벤치를 지키던 박철순은 심판 폭행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또다시 팀을 옮겨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박철순은 이후 서울로 상경하게 되고 역시 당시 신생팀이었던 충암고등학교로 편입을 시도했지만 무산되었고 대신 배명고등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면서 그곳에서 3학년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수차례의 전학 끝에 가까스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 것이다.

 

타고난 신체 조건과 빠른 공을 가지고 있었던 박철순은 1975년 고교 졸업 후 그 재능을 높이 산 연세대에 스카우트되지만 1학년 시절 위궤양으로 거의 시합에 나가지 못했고 1년 만에 연세대를 중퇴하며 군입대를 선택한다.

 

사진|한국 프로야구 원년 우승을 이끌었던 '불사조' OB 베어스 박철순의 포토 카드 (출처.MLB PARK)

 

배명고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1년을 보낼 때까지 체격이 좋고 공이 빠른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볼 게 없는, 그래서 전국무대에서 거둔 성적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박철순이 투수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공군팀 ‘성무’에서였다.

 

그곳에서 박철순은 독한 근성의 사나이 이종도와 부대끼며 ‘드디어 야구를 레크리에이션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당대 절정의 기량을 자랑하던 명투수 남우식에게 과외 교습을 받으며 ‘야구 기술’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군대 말년에 출전한 1978년 백호기 결승에서 연세대 최동원과 완투 맞대결을 벌여 2-0으로 승리하며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그것을 계기로 국가대표로 발탁돼 쿠바전 최초의 승리 투수가 된다.

 

실업팀 롯데는 제대 후 박철순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군 제대를 1년이나 남겨놓은 상태에서 비밀리에 입단 계약을 체결하고 급여까지 지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규정상 아무리 제적 상태여도 대학 중퇴자가 실업팀에 입단하기 위해서는 원소속팀인 연세대의 동의가 필요했다. 하지만 연세대는 이미 대형 투수로 성장한 박철순의 롯데행에 끝까지 동의서를 써주지 않으며 복학을 종용했다.

 

어쩔 수 없이 연세대 2학년으로 복학한 박철순. 하지만 당시 연세대에는 국내 최고의 투수 최동원이 있었다.

 

슈퍼스타로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최동원과 역시 불같은 성격의 박철순은 이내 신경전을 벌이게 되고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예비역 2학년 박철순이 3학년 후배인 최동원에게 심한 기합을 주는 일이 일어나면서 최동원이 학교를 무단이탈하는 일이 벌어진다.

 

최동원은 학교를 옮기겠다는 실현성 없는 주장을 고집하다가 근 1년간 유니폼을 벗다시피 했고 겨우 복귀한 시점이 가을에 벌어진 추계리그 직전이었다. 그 사이 박철순은 최동원을 대신해 연세대 에이스를 맡으면서 활약했고 대학 선발에 뽑히기도 한다.

 

하지만 최동원이 복귀하면서 이번에는 박철순이 더 이상 연세대 야구부에 있기 힘든 상황이 되어 결국 또다시 2학년을 끝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불사조 전설의 시작, OB 베어스 박철순

그 이후 박철순은 미국으로 진출한다. 대학 대표 시절을 눈여겨본 미국 스카우트가 박철순에게 접촉한 것이다. 이때는 연세대도 흔쾌히 허락하면서 박철순은 국내 야구 선수 중 백인천, 이원국에 이어 세 번째로 해외 프로야구에 진출하는 선수가 된다.

 

그렇게 1979년 10월 23일, 박철순은 미국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의 유니폼을 입는다. 계약 내용은 계약금 1만 달러, 월봉 700달러, 이듬해 마이너리그에서부터 선수 생활을 하는 조건이었다.

 

1980년 1월 9일, 스물다섯 살의 박철순은 밀워키로부터 정식 초청장을 받았다. 같은 달 28일 대한체육회 강당에서 입단식을 열었고 같은 해 3월 6일 박철순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박철순은 곧바로 밀워키 산하 마이너리그 구단에서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한다.

 

박철순은 “같이 훈련받은 30명의 투수 중 종합 평점에서 4위에 올랐고 테스트 합격이 거의 확실시 된다”고 말했다. 한국 최초의 미국에 진출한 야구 선수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사진|1980년 1월 29일 박철순이 미국 프로야구 밀워키 브루어스 유니폼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출처.일간스포츠)

 

그러나 메이저리그의 마운드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해 5월 박철순은 어깨 부상을 당하며 경기는커녕 연습에도 제대로 참가하지 못한다. 회복에는 3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박철순을 스카우트했던 밀워키 구단의 산하 마이너리그의 총책임자 레이 포이테빈트는 8월 “박철순이 부상에서 완쾌했고 제 컨디션을 완전히 되찾았다” “지금 상황만 유지한다면 메이저리그 승격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박철순의 데뷔 시즌 성적은 이렇다. 싱글A에서 11경기에 출전했고 이 중에서 6경기를 선발로 등판했다. 최종 성적은 3승 2패 평균자책점 2.31. 승수가 적기는 했지만 당시 팀 투수진들 중 평균자책점 3위로 안정감을 자랑했다.

 

2년 차에 들어서며 출장 기회가 많아졌다. 1981년에는 싱글A와 더블A를 오가며 25경기 모두 선발로 등판했고 8승 10패 평균자책점 4.77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입성도 머지않은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그 해 9월 6일 휴가차 귀국한 박철순은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미국 복귀를 포기하고 OB와 총 4,400만 원에 계약한 것이다.

 

당연히 원 소속 구단인 밀워키는 발끈했다. 밀워키는 계약 위반이라며 “벌금으로 7만 달러(당시 환전 시세로 약 5,000만 원)를 내라”고 통보했다. 계약서 상으로도 1983시즌까지 밀워키 산하 마이너리그 구단에서 뛰기로 했기 때문에 반박할 말도 없었다.

 

박철순은 “벌금이 얼마인지도 몰랐다. 액수를 알고 보니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프로라는 개념조차 없던 당시의 한국야구가 낳은 촌극이다.

 

당시 박용민 OB 단장은 “박철순이 필요하지만 벌금이 워낙 많아 고민이다”라고 말을 아꼈다. 결국 박용민 단장이 미국을 방문해 밀워키 구단주와 협의 끝에 사례금조로 2만 5,000달러를 지불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박철순은 OB와 계약금 2,000만 원, 연봉 2,400만 원을 받기로 사인하며 어렵사리 한국 프로야구에 발을 내디뎠다. 박철순은 마이너리그에서 2년의 시간을 보내며 11승 12패 평균자책점 4.30이라는 성적을 남겼다.

 

사진|박철순의 밀워키 브루어스 입단을 보도했던 스포츠 신문 기사 (출처.중앙일보)

 

박철순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성기인 1982시즌, 박철순은 선발, 마무리 가릴 것 없이 80경기 중 36경기에 등판하며 224.2이닝을 던져 전체 팀 이닝 중 29.1%나 소화하는 혹사를 하면서도 24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1.84 WHIP 0.97이라는 괴물 같은 성적을 올렸다. 특히 1982년 9월 22일 롯데전까지 무려 22연승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공 쥔 손을 벨트 라인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가 허리를 앞으로 숙이는 힘을 더해 투석기처럼 강하게 팔을 휘둘러 던지는 특유의 투구폼 때문에 허리 부상의 위험을 달고 다녔던 박철순은 거의 하루 걸러 한 번씩 등판하는 혹사로 인해 1982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허리를 다치게 된다.

 

1982년 한국시리즈 1, 2차전에서 등판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사진|몸 축을 안쪽으로 회전 시키며 강하게 팔을 휘두르는 박철순의 투구폼 (출처.한국야구 레전드)

 

그러나 결국 한국시리즈 3차전부터 진통제를 맞으면서 출장을 강행했다.

 

당시 OB 김영덕 감독은 박철순이 등판하겠다고 하자 “미친놈, 지랄하지 마라”는 식으로 욕설까지 하면서 말리려 했지만, 죽어도 마운드에서 죽겠다며 바득바득 우긴 박철순의 강력한 의지에 질려버린 김영덕 감독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박철순의 청을 들어주었다.

 

박철순의 부상에 대해 김영덕 감독은 한결같이 자신이 제대로 관리해 주지 못한 탓에 다친 것이라며 자책하던 반면, 박철순은 김영덕 감독을 ‘아버지’라고 호칭하면서 “내가 아버지(김영덕 감독)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등판했다가 다쳤는데 아버지가 나를 혹사시켰다고 욕을 많이 드셨다. 전부 내 탓인데 그분께서 비난받으실 이유는 전혀 없다”라면서 김영덕을 감쌌다.

 

무시무시한 혹사로 유명한 김성근 당시 OB 코치조차 놀랐을 정도로 당시 박철순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리고 기어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 짓는 투구를 만들어낸다.

 

사진|프로야구 원년 우승을 이끌었던 OB 베어스 포수 김경문과 투수 박철순 (출처.두산 베어스)

 

하지만 심각한 허리 부상에도 불구하고 국소마취제를 맞아가며 경기에 등판해 팀의 우승을 이끌었던 후유증이 이듬해부터 시작됐다. 지병이던 허리 디스크가 악화되면서 1983년 시즌 1승도 거두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박철순은 한 해를 거의 통으로 쉬다가 팬 서비스 차원에서 팀의 1983년 정규시즌 후기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9월 22일 잠실 MBC 청룡전에 선발로 등판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1회 초 투구 때 MBC 송영운이 친 직선타가 허리에 정통으로 맞는 불운까지 겹치며 바로 강남성모병원으로 실려갔고 1984년에는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하는 비운을 경험했다.

 

사진|부상으로 투구 도중 마운드에 주저앉은 박철순 (출처.두산 베어스)

 

1983년 말 미국으로 건너가 스포츠 의학의 권위자이던 프랭크 조브 박사의 집도로 허리 수술을 받았지만, 1차 수술이 실패하면서 하반신 마비가 왔다. 다행히 재활 운동과 2차 수술 결과가 좋아서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독한 약물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지고 체중이 심하게 줄어드는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박철순은 한국으로 돌아와 뼈를 깎는 재활 훈련 끝에 다시 구위를 조금씩 회복하면서 1985시즌 OB에 복귀하여 9경기 등판에 1승 4패 평균자책점 2.68을 기록했고 이듬해인 1986년 5월 26일 잠실 롯데전에서 무려 1,346일 만의 완봉승을 거두는 등 그 해 13경기에 나가 5승 3패 평균자책점 3.54로 부활의 기미를 보였다.

 

1987년, 박철순은 선수 겸 2군 투수코치로 계약을 맺고 전반기는 주로 2군에서 후배들을 지도하며 가끔 2군 경기에 등판하다가 구위가 회복되었다고 판단한 OB 김성근 감독이 후기리그 막판에 박철순을 1군에 올렸다.

 

박철순은 1987시즌 5경기 등판에 그쳤지만 2승 1세이브 평균자책점 2.25를 기록했고, 무엇보다도 전성기 시절의 구위를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사진|베어스 역사상 유일하게 등번호 21번을 달고 활동한 선수로 남아있는 박철순 (출처.MLB PARK)

 

그러나 1988시즌 개막이 눈앞이던 3월, 오랜 투병 생활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이 겹친 박철순을 돕기 위해 구단 프런트가 주선한 속옷 CF 촬영 도중 점프하는 장면을 찍다가 착지를 잘못하면서 왼쪽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대참변을 당했다. 본인 스스로도 이때 구단에서 방출당했어도 할 말이 없었을 큰 부상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발목 힘줄이 완전히 오그라들어 걷기는커녕 왼쪽 발꿈치가 땅에 닿지도 않는 처지였지만 박철순은 또다시 근성을 발휘하여 1년 내내 뚝섬에 있는 골프 연습장에 매일 목발을 짚고 가서 퍼터로 골프공을 필드로 날리고, 그 공을 절뚝거리며 주우러 가기를 반복하는 걷기 훈련에 전념한 끝에 기적적으로 회복하면서 그라운드로 복귀했다.

 

허리, 발목, 허리, 발목. 지긋지긋하게 반복되었던 부상의 늪에서 헤어 나오는 데만 십여 년이 걸렸다선수 생명을 끝낼 수도 있는 큰 부상을 당하고도 그때마다 불굴의 정신으로 마운드로 돌아오는 박철순에게 팬들은 ‘불사조 박철순’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

 

이런 치명적인 부상을 딛고 끝내 재기에 성공한 박철순은 1989년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1990시즌 이후로는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1996년까지 현역 생활을 이어간 박철순은 프로야구 원년 선수 중 1997년에 은퇴한 이만수 다음으로 현역에서 오래 뛴 선수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1994년, 최악의 한 해 보낸 OB 베어스

1994년은 OB에 희망의 기운이 충만했던 해였다. 1980년대의 불운에 지쳐 1990년과 1991년 두 해 연속 꼴찌로 주저앉았던 OB는 1993년 프로 선수 출신 감독 1호인 원년 멤버 윤동균 감독을 중심으로 서울 라이벌 LG 트윈스를 막판에 밀어내고 최종일에 3위로 올라서는 통쾌한 역전극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그 시즌 팀의 66승 중 혼자 32번의 승리를 지켜낸 철벽 마무리 김경원과 전성기에 들어선 김상진, 권명철, 강병규가 이끌어낸 2점대의 팀 평균자책점 그리고 신인 유격수 김민호와 김형석, 김광림, 김상호의 ‘KKK포’가 이끄는 타선은 팀의 재구성이 완벽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물론 ‘감독 신인’ 윤동균 감독의 작전 능력이 빠르게 완숙해지면서 후반기 급상승 분위기를 이끌었던 것도 주효했다. 그러나 지난해의 희망을 이어 우승권을 넘볼 것으로 기대했던 1994년은 OB 역사상 아니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비극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사진|1994년 OB 베어스의 항명 사건을 보도했던 뉴스 화면 (출처.The 레전드)

 

바로 윤동균 감독의 체벌에 항명하며 선수들이 집단으로 이탈한 것이다. 선수들의 선수 생명뿐 아니라 한국 프로야구의 생명 자체가 위기에 몰렸던 그 사건은 결국 윤동균 감독이 퇴진하고 몇몇 선수들이 크고 작은 징계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남은 상처는 작지 않았다. 김형석이 써나가던 연속 경기 출장 신기록은 ‘622경기’에서 멈추었고 내내 2군에 머무르다 1군에 승격한 당일에 사건에 휘말린 거포 강영수는 오로지 선배의 책임감 때문에 맨 윗줄에 이름을 올린 죄로 방출되는 신세에 내몰렸다.

 

선배 출신 감독을 내몰았다는 곱지 않은 시선은 프로선수의 자긍심과 의욕을 갉아먹고 있었다. 사기는 바닥을 지나 땅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성적 역시 쌍방울 레이더스 덕에 최하위를 간신히 면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1995시즌을 앞두고 그런 OB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해에도 관심의 초점은 ‘역대 최강 전력’ LG였다.

 

1995년 대역전극의 원동력은?

LG는 지난 1994시즌의 18승에 만족하지 않고 내친김에 20승 고지에 올라선 ‘야생마’ 이상훈을 중심으로 ‘기분 좋은 날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던’ 김태원과 ‘기분 나쁜 날에도 무너지지는 않았던’ 정삼흠으로 구성된 선발 삼각편대에 차명석, 김기범, 차동철이 버티는 노련한 허리에서 마무리 ‘노송’ 김용수로 이어지는 마운드는 역사 속에서도 비교할 대상이 마땅치 않은 최강 중 하나였다.

 

물론 ‘방위병 출장 금지 처분’의 유탄을 맞고 균열이 생기기는 했지만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에서 한대화, 송구홍, 박종호로 이어지는 야수진도 빠질 곳이 없었다.

 

그에 비해 1993년에 확인된 선수진은 빠지지 않는다 쳐도 안에서부터 무너진 OB는 하위권 예상팀이었다. 그러나 1995시즌 OB는 또 한 번 트레이드 마크인 ‘뒷심’을 발휘하며 시즌 막판 숙적 LG를 반 경기 차로 제치고 1위로 올라서는 역전극을 재현했다.

 

무엇이 비결이었을까? 안으로부터 무너진 강팀이 되살아나 보여준 ‘돌풍 아닌 돌풍’의 진원지는 두 사람이었다. 윤동균 감독의 후임으로 급히 투입된 ‘화합의 전도사’ 김인식 감독. 그리고 항명파동의 핵심이었던 ‘불사조’ 박철순이 그들이었다.

 

사진|1995년 OB 베어스 시절의 김인식 감독 (출처.두산 베어스)

 

“윤동균 감독님, 옷 벗으십시오. 저도 옷 벗겠습니다” 1994년 9월 6일 양평의 한 콘도에서 박철순은 기자들을 향해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뒤에 늘어서 있는 OB 선수들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가만히 있어라. 내가 다 책임진다. 감독님 하고 나는 원년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이야. 걱정 마라. 우리가 멋있게 끝낼 테니까” 평소보다 굵어진 박철순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배어 있었다. 훈련장을 이탈해 사흘째 콘도에 머물고 있던 선수들 사이에서는 이따금 콧물 훌쩍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자신을 불태우다

박철순은 우리 프로야구가 만들어낸 첫 번째 스타플레이어였다. 1982년 실밥이 그대로 보일 지경으로 정지된 채 흘러들던 100km/h 안팎의 ‘팜볼’과 원격 조종으로 방망이를 피해 가는 듯했던 ‘포크볼’은 만화에 나오던 ‘마구’가 허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게다가 그런 ‘감속구’와 섞여 들어오던,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았던 140km/h대의 강속구는 체감 속도 150km/h 이상으로 날아가는 듯한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주고는 했다.

 

사진|박철순의 팜볼 그립과 구종 설명 (출처.MLB PARK)

 

그렇게 차원이 다른 공을 가지고 박철순은 22연승의 대기록을 비롯해 1982년 80경기 밖에 치르지 않던 시즌에서 24승을 쌓아 올리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미 소진된 몸으로 원년 우승을 위해 경기장 밖에 세워둔 구급차에서 은밀히 주사를 맞아가며 공을 던진 끝에 얻은 허리 디스크.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 다섯 번이나 되풀이된 부상. 또한 세 번이나 거듭 절단된 아킬레스건.

 

그렇게 원년의 기억만으로 ‘전설’이었던 박철순은 이미 몇 해 동안 이어진 구단의 은퇴와 코치직 제안에도 불구하고 2군을 오가는 수모를 겪으며 선수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1995년은 박철순의 한국 프로야구 14년 차였다.

 

1995시즌을 앞두고 박철순은 비어있는 연봉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이미 100승 투수 장호연은 물론 김형석, 김상호 같은 조카뻘 선수들보다도 적은 연봉을 받고 있던 박철순은 그나마 ‘내 몫’에 대한 집착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후배들을 이런 말로 다잡았다. “너희들 마음이 괴로운 것 다 안다. 야구 그만두고 싶은 사람도 많은 것 안다. 그런데 야구 선수는 박수를 받든 욕을 먹든 야구장에서 죽어야 하는 거다. 이만한 어려움도 없으면 성공의 기쁨도 없다. 우리가 손가락질받는 선수에서 박수받는 선수가 되는 길은 올해 야구 잘해서 다시 우승하는 것뿐이다. 야구할 자격도 없는 놈들이라는 비난을 날려버리는 방법은 올해 우승하는 것뿐이다” 박철순은 양평 콘도에서 뭉쳤던 울분을 그대로 우승이라는 목표로 돌려세웠고 김인식 감독은 그것을 그대로 껴안았다.

 

사진|OB 베어스 선수단의 정신적 지주이자 마운드의 기둥이었던 박철순 (출처.두산 베어스)

 

그 해 OB는 포기하지 않는 야구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신인 정수근과 3년 차 김민호는 쉴 새 없이 상대 내야를 헤집었고, 김형석과 김상호는 주자들을 알차게 불러들였다. 2군에서 올라온 약관의 심정수는 곧장 21개의 홈런을 넘겨대며 무너진 상대 마운드를 다시 한번 밟았다.

 

마운드에서는 17승의 김상진과 15승의 권명철이 앞장섰고, 김경원이 다소 주춤했던 마무리의 빈틈은 이용호와 진필중이 완벽하게 메워놓았다. 그리고 박철순. 그 해 박철순은 100이닝에 가까운 공을 던지며 9승을 올렸다.

 

때로는 선발로, 때로는 중간 계투로, 때로는 마무리로 등장하는 박철순은 한 명의 투수라기보다는 성스러운 종교의식의 집전관에 가까웠다.

 

투수 교체를 알리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겹쳐 권인하의 목소리로 ‘에이스를 위하여’가 구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OB 선수들과 관중들은 또 한 페이지 역사의 순간에 참례한다는 감격과 또한 알 수 없는 흥분에 달아올랐고, 상대팀 더그아웃은 자기 쪽 응원석마저 들떠가는 난감한 광경을 애써 외면하며 헛기침 속으로 잦아들곤 했다.

 

사진|좌-우 코너웍이 일품이었던 박철순의 140km/h대 패스트볼 (출처.한국야구 레전드)
사진|정통파 오버스로의 투구폼과 큰 낙폭으로 타자와의 승부에서 강점을 보였던 박철순의 커브 (출처.한국야구 레전드)

 

결국 OB는 막강 LG를 반 경기 차로 밀어내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해서 다시 LG를 잡고 올라온 롯데와 맞섰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롯데의 한국시리즈가 항상 그랬듯 그 해의 한국시리즈도 지긋지긋한 혈전이었다.

 

7차전 최종전까지 이어지며 무려 5번이나 8회 이후에야 승부가 갈리는 열전이 거듭되었고 그런 난전 속에서 승자와 패자는 객관적 전력이 아닌 집념과 집중력에서 갈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3승을 먼저 올려놓고도 6차전 역전패를 당해 원점으로 몰려간 롯데는 정신력의 핵인 박정태의 결정적인 실책으로 두 점을 헌납하며 무너졌다. 반면 OB는 마지막까지 무너지지 않는 대열로 무려 13년 만에 우승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한국시리즈 MVP로는 4할에 가까운 타격에 도루를 무려 6개 성공시키며 롯데 마운드와 내야를 교란한 김민호가 뽑혔다. 그러나 축포가 오른 순간 잠실구장의 주인공은 박철순이었다. 마운드의 권명철이 마지막 아웃 카운트 한 개를 남겨놓은 순간 카메라가 포착한 얼굴 역시 더그아웃의 박철순이었다.

 

박철순, 이름만으로도 짙게 떨려오는 느낌

권명철이 마지막 손동일을 내야 땅볼로 잡고 우승을 확정 지은 순간, OB 선수들은 김인식 감독을 헹가래 친 다음 박철순을 무동 태운 채 잠실구장을 달렸다. 그 순간은 짧게는 지난해의 불운을 씻어내는 흥분이었고 길게는 1982년 우승의 다음 장을 써 내리는 13년 OB 역사의 한 획이었다.

 

사진|1995년 우승을 차지하고 기뻐하는 OB 베어스 선수단의 모습과 무동을 타고 올라선 박철순 (출처.두산 베어스)

 

이듬해인 1996년을 마지막으로 박철순은 야구공을 놓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가다 문득 멈춰 섰을 때, 프로 원년을 함께 시작했던 이들 중 아직 현역으로 유니폼을 입은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1997년, 박철순은 15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4월 29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LG와 OB의 홈경기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표가 모두 팔려나가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그 뒤로 다시 베어스의 평일 홈경기가 매진되는 데는 무려 12년 4개월이 걸릴 만큼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오직 그날 통산 76승을 기록했을 뿐인 ‘그저 그런’ 한 노장 투수의 은퇴식이 열린다는 이유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인파였다. 기록으로는 다 설명하기 어려운, 박철순이라는 특별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응원팀에 상관없이 3만 명의 눈물 어린 박수갈채를 받으며 마운드에 오른 ‘인간’ 박철순은 더 이상 마운드에 뿌릴 뼛가루조차 남지 않고 완전히 불타오른 ‘야구 선수’ 박철순을 묻어놓은 무덤, 마운드에 입을 맞추며 사라져 갔다. 그리고 박철순의 등번호 21번은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번호로 비었다.

 

사진|1997년 4월 29일 은퇴식, 마운드에 입을 맞추며 정든 그라운드를 떠나는 '불사조' 박철순 (출처.두산 베어스)

 

어린 나이부터 남들이 겪지 못했던 방황을 겪었던 것을 시작으로 선수 생활 내내 순탄치 않았던 세월을 보냈던 박철순. 과연 불사조라는 별명에 가장 걸맞은 선수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최고의 업적을 쌓은 선수도 아니었고, 가장 훌륭한 도덕적 기준을 제시한 사람도 아니었으며, 대단히 살뜰하게 후배들을 끌고 당겨준 선배도 아니었던 박철순. 하지만 그런 그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삶이 그렇듯 야구 역시 단순하지 않은 굴곡의 드라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표|박철순의 통산 투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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