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LEGEND] 완전 연소의 승부사, 롯데 자이언츠 슈퍼 에이스 ‘철완’ 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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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최동원이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다. 그 앞으로도 뒤로도 야구장에서는 느껴본 적이 없는 어색한 풍경이었다.

 

하늘색 삼성 유니폼은 마치 얻어 입은 것처럼 겉돌았고, 최동원이 빠지고도 롯데 자이언츠를 여전히 ‘롯데 자이언츠’라고 부른다는 사실 또한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해마다 연봉 협상에서 몇십만 원 되지도 않는 돈을 놓고 자존심 싸움을 하느라 질려버린 데다가 선수협회 결성을 주도하며 미운털까지 박힌 골칫덩어리를 치워버리고 싶었던 롯데와, 어떻게든 우승을 하려면 최동원 같은 근성과 투지의 에이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삼성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였다.

 

사진|삼성 라이온즈 시절의 최동원 (출처.MLB PARK)

 

한국 프로야구 사상 유일무이한 ‘한국시리즈 4승 투수’ 최동원과 ‘최초의 100승 투수’ 김시진이 맞바꾸어지는 초대형 트레이드(롯데 최동원·오명록·김성현·김용철·이문한 ↔ 삼성 김시진·전용권·오대석·허규옥·장효조·장태수)는 그렇게 이루어졌고, 두 대투수의 전설도 그 순간 서둘러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야구의 대명사, 최동원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이었던 1980년대 초반, 평범한 열 살 안쪽의 아이가 ‘야구’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첫 번째 이름은 단연 최동원이었다. 축구라면 차범근, 농구라면 신동파나 박찬숙이 그랬듯, 그 이름은 그대로 야구의 대명사였던 것이다.

 

그뿐인가? ‘한 시간 동안 움직일 수 있는 거리’로서 가늠되는 ‘시속’이라는 물리학의 속도 개념을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꼬마 녀석들이 알 수 있었던 것 또한 최동원 때문이고, 그 ‘시속’을 측정할 수 있는 ‘스피드건’이라는 기계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었던 것 또한 최동원 때문이었다.

 

스피드건이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그걸로 최동원의 공을 측정했더니 나왔다는 ‘150’이라는 숫자는, 신동파의 50득점(3점 슛이 없던 시절의 기록), 차범근의 98골, 장훈의 3,000안타와 별다를 것 없이 현실감 없는 경지의 이미지일 뿐이었다.

 

사진|경남고 시절 최동원(왼쪽)과 연세대 시절의 최동원(오른쪽) 모습 (출처.KBO)

 

경남고 시절부터는 전국구 투수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최동원은 경남고 1학년 때인 1974년, 황금사자기에서 대구상고를 상대로 구원 등판해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2학년 때인 1975년 황금사자기에서 당시 2관왕을 기록 중이던 최강팀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거두기도 했으며 이 경기를 포함해 17이닝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기도 했다.

 

최동원의 전성기였던 1976년에는 청룡기 4강전에서 선린상고를 상대로 11탈삼진 완봉승을 기록했고, 승자 결승에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를 상대로 20탈삼진을 달성하며 팀을 결승전에 진출시켰다. 그리고 최종 결승전에서 다시 마주한 군산상고를 상대로 12탈삼진 완투승을 기록하며 최동원은 청룡기를 혼자 힘으로 우승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후 최동원은 원래 고려대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중앙정보부의 강압에 의해 진학이 취소되었고, 이에 고향에 있는 동아대학교 진학을 하려 했으나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학을 거부받았다.

 

군대라도 빨리 다녀오려고 육군 경리단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곳에서도 받아줄 수 없다고 했고, 고위 관계자의 공작에 의해 결국 최동원은 연세대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연세대 시절, 1978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때 동아대와의 준결승전에서 임호균과의 1박 2일에 걸친 18회 연장 승부는 굉장히 유명했다. 14회까지 0-0으로 진행되다 일몰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어 다음날로 이어졌고, 결국 김봉연의 솔로 홈런으로 최동원의 연세대가 1-0으로 승리를 거뒀다.

 

그러고도 최동원은 같은 날 곧바로 열린 성균관대와의 결승전에 선발로 등판해 또 9이닝을 완투했고 이틀 동안 무려 투구수 375개, 27이닝 12피안타 33탈삼진 2실점을 기록한 끝에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오죽 최동원의 투혼이 감동적이었으면 적장이던 성균관대 김동엽 감독이 경기 후 마운드로 올라가 최동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듬해 사건이 벌어졌다. 1979년 3월 21일, 대통령기 쟁탈 동국대와의 준결승에서 공군을 제대하고 2학년으로 복학한 박철순이 선발투수로, 3학년인 최동원이 마무리 투수로 출전해 각각 2점씩 실점하며 경기는 4-2로 패배했다.

 

경기에서 지자 연세대 선배들은 패배의 책임을 물어 최동원을 구타했다. 이때 허리를 잘못 구타당해 팬티가 피범벅이 되고 허리 아랫부분이 시커멓게 죽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는다.

 

이 과정에서 학교는 구타 사실을 은닉하기 위해 최동원이 무단이탈했다는 사실무근의 언론을 내보낸다. 훗날 야구계의 전설이 될 인재가 선배들의 폭력 때문에 야구 인생이 끝날 뻔한 것이다.

 

사진|연세대 시절의 최동원 모습 (출처.KBO)

 

최동원이 연세대 시절 무시무시한 구위로 1978년 로마 세계야구선수권대회, 1981년 대륙간컵 국제야구대회 등 국제대회에서 맹활약하자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주목했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까지 했으나 병역특례 혜택을 받은 뒤에도 5년 동안 국내에서, 그것도 아마야구에서만 활동해야 대체 복무로 인정되는 병역법 때문에 바로 해외에 나갈 수 없었다.

 

병역 문제가 아닌, 메이저리그 계약이 최하급이었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사실과 다르다. 토론토는 계약 기간 4년, 옵션 20만 달러 포함 총액 61만 달러 계약을 최동원에게 제시했다. 이 정도 금액이면 최하급이 아니라 오히려 특급 대우다.

 

연봉도 첫 해인 1982년에만 최저 연봉인 3만 3,500달러일 뿐 바로 다음 해 연봉은 6만 6,500달러, 3년 차에는 11만 5,000달러, 4년 차에는 18만 5,000달러에 달했다.

 

사진|최동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폭포수처럼 큰 낙차를 선보이며 떨어지는 커브 (출처.MLB PARK)
사진|최동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폭포수처럼 큰 낙차를 선보이며 떨어지는 커브 (출처.MLB PARK)
사진|최동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폭포수처럼 큰 낙차를 선보이며 떨어지는 커브 (출처.MLB PARK)
사진|최동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폭포수처럼 큰 낙차를 선보이며 떨어지는 커브 (출처.MLB PARK)

 

당시 토론토의 1선발로 4년 차였던 짐 크랜시의 1981년 연봉이 16만 7,000달러라는 걸 생각하면 토론토 측에서 최동원에게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애초에 프로 리그조차 없던 국가의 투수에게 4년간 연봉을 무조건 보장한다는 시점에서 매우 높은 기대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토론토는 프로 경험이 전무한 최동원이 입단 4년 차가 되면 1981년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19만 6,500달러)을 받을 수 있는 투수로 성장하리라 예상했고 그래서 1985년 연봉을 18만 5,000달러로 정한 것이었다.

 

그 당시 토론토 측에서 해외 언론에 밝힌 최동원의 프로필을 보면 당장 메이저리그 즉시 전력감으로 평가하며 메이저리그 평균 수준의 패스트볼과 커브 그리고 메이저리그 상위 수준의 슬라이더와 제구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토론토는 최동원을 영입하기 위해 시의회 의장이 한국 정부에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희망하는 진정서를 보내고 법정행 카드까지 들고 나오며 그 후 몇 년 동안이나 포기하지 않았으나 결국 최동원은 해외 진출을 포기하고 1983년에 롯데와 계약하게 된다.

 

사진|최동원의 롯데 자이언츠 입단 사진. 옆에 있는 이는 롯데 박영길 감독 (출처.나무위키)

 

그러나 그 대단하다는 최동원이 프로 무대에 나타났던 1983년, 동네 아저씨들은 이미 ‘예전의 최동원이 아니다’라며 고개를 저었고, ‘한 5, 6년 전에 프로가 생겼으면 한 몫했을 것’이라며 혀를 찼다.

 

지금 따져보면 208.2이닝을 던지며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대활약이었음에도, 사람들은 이기는 경기(9승) 보다 지는 경기(16패)가 훨씬 많은 데다가 427.1이닝을 던졌던 재일교포 퇴물 투수 장명부(삼미 슈퍼스타즈)의 절반만큼도 못 던지는 ‘유리 어깨’로 전락한 최동원을 용납하지 못했다.

 

하기야 경북고와 선린상고를 상대로 이틀 연속 등판해 17이닝 동안 노히트 노런을 이어가고 군산상고를 상대로 20개의 삼진을 빼앗아내던 경남고 시절, 그리고 일주일 동안 6경기에 등판해 3승을 따내며 ‘코리안 시리즈’를 석권했던 실업야구 롯데 시절의 ‘완벽투’에 대한 기억과 마주 세우자면 초라할 수밖에 없는 기록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미 5, 6년 전쯤 지나가버렸다는 최동원의 전성기에 대한 궁금증만이 쌓여가기 시작할 무렵, 최동원은 제대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그 전설적인 1984년의 대폭발을 보여주었다.

 

서른한 번의 승리, 1984년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한 시즌 최다승 투수’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1983년 30승을 올린 장명부다. 그러나 말 그대로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승리를 기록한 투수’는 정규시즌 27승에 이어 한국시리즈 4승을 기록한 1984년의 최동원이었다.

 

원년 에이스 노상수의 군입대, 그리고 부산의 기대주 양상문, 윤학길의 아마추어 잔류로 마운드가 텅 비게 되면서 3년째 하위권 탈출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던 1984년의 롯데가 한국시리즈 우승컵까지 품에 안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드라마였고 기적이었다.

 

사진|대포알 같이 뻗어나가는 최동원의 강력한 패스트볼 (출처.MLB PARK)
사진|대포알 같이 뻗어나가는 최동원의 강력한 패스트볼 (출처.MLB PARK)
사진|대포알 같이 뻗어나가는 최동원의 강력한 패스트볼 (출처.MLB PARK)

 

1984년 전기리그 1위를 달성한 팀은 삼성이었다. 삼성 김영덕 감독은 후기리그에서는 선수들을 쉬게 하여 전력을 보존하고, 각 팀을 분석해서 최대한 만만한 팀을 후기리그 1위로 만든 뒤에 한국시리즈를 무난하게 가져가려고 했다.

 

결국 후기리그 막판에 완전히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을 연발하면서 위협적인 OB 베어스를 떨구고, 대신 롯데를 후기리그 1위 팀으로 만드는 추태를 부렸다. 당시 삼성과 롯데의 마지막 3연전을 중계하던 방송 캐스터가 “이 경기를 중계하고 있는 제가 부끄럽습니다”라는 발언을 할 정도였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롯데는 최동원을 필두로 반격에 나선다. 당시 롯데 감독이었던 강병철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면서 1, 3, 5, 7차전에 등판하도록 최동원에게 지시를 내린다.

 

이에 대해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니냐고 묻자, 강병철 감독은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동원아, 우짜노 이까지 왔는데…”를 말했다. 결국 최동원은 “네, 알았심더. 함 해 보입시더”라고 답변하고 이를 수용한다.

 

 

“네, 알았심더. 함 해 보입시더”

 

 

최동원을 불멸의 투수로 만들어준 1차전 선발 등판 완봉승, 3차전 선발 등판 12탈삼진 완투승, 5차전 선발 등판 완투패, 6차전 구원 등판 5이닝 무실점 구원승, 7차전 선발 등판 완투승으로 홀로 우승을 이끌었던 그 해의 한국시리즈야 워낙 널리 알려진 사건이니, 새삼 다시 회상하기도 민망하다.

 

사진|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은 글 몇 줄 만으로도 읽는 이의 숨이 턱턱 차오르게 만드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출처.롯데 자이언츠)

 

그러나 임호균을 필두로 배경환, 안창완 같은 투수들이 앞서 나가기 시작한 경기를 최동원에게 넘겨주는 순간까지 버텨내기 위해 120%의 능력을 짜내 안간힘을 쓰고도 5회 이전에 마운드를 내려와 성적으로 보상받지 못하는 희생정신을 발휘했던 것도, 1할 타자 유두열이 끝내 희망을 놓지 않고 김일융의 지친 호흡을 노려 한국시리즈 7차전 역전 결승 홈런을 만들어낸 것도, 매번 24시간도 채 못 되는 휴식 시간을 마친 최동원이 어깨를 붕붕 돌리며 나타나 상대의 마지막 저항을 소탕하고 숨 가쁜 1승을 만들어 주리라는 진땀 나는 믿음 덕분이었다는 말만은 덧붙여두고 싶다.

 

어쨌든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 등판 중 홀로 4승(1패)을 거두며 롯데를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국내 유일한 기록이다.

 

사진|'미스터 롯데' 김용희, '진짜 사나이' 김용철, '부산의 영웅' 최동원, '84년 한국시리즈 히어로' 유두열 (왼쪽부터 순서대로) (출처.롯데 자이언츠)

 

결국 1984년의 혹사는 이후 최동원의 선수 생활을 갉아먹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한국시리즈의 혹사만 생각하지만, 당해 최동원은 정규시즌에서도 기록적인 혹사를 당했다. 전년도의 장명부에 비견될 만한 혹사였다.

 

총 51경기 중 선발로 20경기를 나와 14경기를 완투했고, 중간 계투로 31경기를 나와 거의 300이닝에 근접한 투구를 했다. 현대 야구의 관점에서 보면 선발로 등판한 약 150이닝을 빼고 구원 등판한 경기만 봐도 상당한 수준의 혹사다.

 

최동원은 은퇴 후 세월이 흐른 뒤 인터뷰에서도 “우승은 나 혼자만의 영광이 아니라 팀과 팬들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무리는 역시 대가가 있게 마련이더라. 그러나 후회한 적은 없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난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던질 거다. 왜냐? 그게 최동원이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본인의 선수 생명까지 바쳐가면서 구단에 우승을 안겨준 선수에 대한 롯데가 최동원에게 취한 태도는 강제 트레이드였다. 이 때문인지 최동원은 훗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까지는 안 던질 거다”라는 말도 남겼다.

 

두 번째로 위대한, 그러나 가장 사랑받는 투수

그렇게 최동원은 부실한 팀을 한 어깨로 끌고 나가는 선봉장이었고, 무수한 공백을 한 몸으로 막아내는 수문장이었기에 최동원에게 ‘에이스’를 넘어 ‘슈퍼 에이스’라는 찬사가 주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연속 홈런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 타자가 뻔히 알고 기다리는 길목으로 승부구를 욱여넣어 3구 삼진을 노리는, 그리고 홈런을 맞은 다음 타석에서는 다시 한번 똑같은 코스로 더 강한 공을 던져 오기와 배짱을 겨루는 격렬한 승부사였던 최동원은 고작 ‘슈퍼 에이스’라는 이름이 주는 든든함과 단단함에 머물지 않는 매력을 가진 투수였다.

 

우리는 KBO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투수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 앞에서 항상 한 호흡 멈칫하게 된다. 선동열과 최동원이라는 이름 두 개가 동시에 튀어나와 같은 극의 자석처럼 부대끼기 때문이다.

 

사진|선수 시절의 선동열(왼쪽)과 최동원(가운데), 김시진(오른쪽) 각자의 백넘버를 이용해 '18+11=29'를 익살맞게 표현하고 있다 (출처.나무위키)

 

그래도 프로야구의 시대로 한정 짓자면, 한국에서 선동열보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투수는 최동원을 포함해 아무도 없다. 다승으로든 평균자책점으로든 그리고 선발투수로든 마무리 투수로든, 선동열은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압도적으로 승리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 꼭 이겨야만 하는 경기, 가장 절박한 순간의 마운드를 놓고 고민해본다면 많은 이들이 최선의 선택은 최동원이 아니라 선동열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기고 지는 것을 넘어, 박살을 내고 가루를 만들어버리든 하얀 재가 되어 사라지든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신념과 자존심의 승부라면, 어제 경기에서 15이닝쯤 완투한 피로를 이기지 못해 주저앉아 있을망정 다시 한 번 최동원을 불러내 함께 몸을 던져보고도 싶다.

 

최동원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는 전형적인 ‘에이스’는 아니었지만, 걸어야 할 것을 걸고 노려야 할 것을 노려 확실하고 깔끔하게 완전 연소 시켜버리는 처절한 승부사였기 때문이다.

 

최동원은 선동열보다 조금 더 많은 나이, 조금 더 소모된 어깨, 그리고 훨씬 허약한 전력의 팀이라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 뛰었던 선수였고, 그런 이유로 수많은 팬들의 애틋함과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담은 지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최동원에게 좀 더 어린 나이, 싱싱한 어깨, 강한 팀이 주어졌다고 해서 선동열보다 나은 성적을 냈으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아니, 그런 상상 자체가 구차스럽다.

 

사진|최동원은 상대 타자가 뻔히 알고 기다리는 길목으로 승부구를 욱여넣어 3구 삼진을 노리는 오기와 배짱을 겨루는 격렬한 승부사였다 (출처.롯데 자이언츠)

 

하지만 만일 최동원에게 좀 더 강한 팀이 허락되었고 든든하게 뒤를 맡아줄 파트너가 주어졌다면, 최동원은 좀 더 날카롭고 강하게 질주하는 ‘슈퍼 돌격대장’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고, 분명히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가파른 기념비 몇 개를 KBO리그에 더 세워두는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냉정하게 한 명의 이름만 말하자면 최동원은 ‘사상 최고’가 아니다. 그리고 화려했던 한순간을 지낸 뒤로는 그리 빛나는 길 만을 걸어온 이도 아니다. 그러나 최동원은, 한국 프로야구 사상 가장 깊고 애틋한 사랑을 받는 투수임에는 틀림없다.

 

마치 마지막 장면, 정지 화면의 콩 볶는 듯한 총성 속으로 돌진하던 《정무문》의 이소룡, 혹은 《내일을 향해 쏴라》의 로버트 레드포드와 폴 뉴먼처럼, 길고 긴 여운을 남기는 그의 이름은 그대로 한국 야구의 상징이고 드라마이며 추억이다.

 

표|최동원의 통산 투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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