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LEGEND] 대한민국 국보 투수, ‘무등산 폭격기’ 해태 타이거즈 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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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투수’의 화려한 등장, 1986년 선동열

한국 축구가 차범근, 한국 농구가 허재라면, 한국 야구는 선동열이다. 다시 말해 선동열은 곧 한국 야구였다.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로 한·일 야구 20년을 평정한 진정한 에이스.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아시아 야구 역사를 다시 쓴 이가 선동열이었다.

 

사진|광주일고 '괴물 투수' 시절의 선동열 (출처.중앙일보)

 

1980년, 빚고을 광주가 뒤숭숭하던 그때 그 시절, 훗날 국보(國寶)라 불리는 투수 하나가 등장했다. 중학교 때 이미 130km/h 중반, 고등학교 때 140km/h 후반대의 구속을 던졌던 선동열은 자타공인 ‘괴물’이었다.

 

먹는 게 부족하고 관리가 허술했던 30년 전 야구 환경을 생각해 볼 때, 선동열은 타고난 투수였다. 광주일고 3학년인 1980년에는 첫 전국대회였던 대통령배에서 에이스 겸 5번 타자로 출장해 4강 충암고전에서 4피안타 완봉승을 따냈고 결승전에서는 이순철이 유격수로 뛴 광주상고를 만나 구원 등판해 우승을 지켰다.

 

같은해 봉황대기에서는 경기고와의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등 더 이상 고교 무대에 적수가 없음을 알렸다. 선동열이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0년에는 프로야구 출범 이전이었기 때문에 대학 진학이 당연시되었고, 당시 초미의 관심사는 선동열이 ‘어느 대학을 가느냐’였다.

 

사진|1980년, 대학 야구 스토브리그는 쟁쟁한 고교 대어들 덕분에 활활 타올랐다. 선동열, 윤학길, 이순철 등 투-타 유망주들의 진로를 예상한 기사 (출처.동아일보)

 

1981년, 대학 졸업반이던 최동원과 김시진, 김용남 ‘우완 빅3’가 한꺼번에 실업팀으로 향하면서 선동열-윤학길-이길환-정삼흠-이상군으로 이어지는 고교 대어들의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했다. 이 배경에는 A급 투수 한 명만 잡아도 대학 무대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전망이 깔려있었다.

 

연세대와 한양대가 선동열을 입학시키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지만 결과는 고려대 진학이었다. 선동열의 아버지 선판규 씨가 직접 고려대 야구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고려대에 진학시킬 의사를 내비쳤고 일사천리로 입학 절차가 진행되어 선동열은 1981학번으로 고려대에 입학한다.

 

이로 인해 고려대는 선동열, 정삼흠에 이어 중앙고 출신의 안언학과 전주고 강상진마저 확보하게 됐고 이에 뒤질세라 연세대도 윤학길, 이길환을 스카우트하며 맞불을 놓았다.

 

정기 연·고전에서 선동열은 두 차례 출장해 모두 완봉승을 기록했다. 1981년에는 출장하지 못했고 윤학길이 선발로 등판한 연세대에 0-3으로 패배했다. 하지만 1982년에는 3-0 완봉승, 1984년에는 6-0 완봉승을 거두었다.

 

선동렬의 기량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물이 올라 대학 시절 만개했다는 평이며, 선동렬 본인도 대학 시절에 가장 공이 빨랐다고 회고했다. 그 결과 위에서 언급한 2경기 완봉승이나 아래 서술할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MVP 수상 등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대학 시절의 선동열은 야구 국가대표팀에 승선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매년 대표팀 승선 명단 맨 앞자리는 선동열이었고 고려대 입학 이후,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어 1981년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 참여해 김건우, 조계현 등과 함께 초대 우승을 일궈냈다.

 

국가대표 선동열의 활약은 프로야구가 생긴 1982년 9월도 다르지 않았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고려대 2학년 선동열

현재 서울 잠실구장의 건립 목적이었던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10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는 대학-실업 스타들의 경연장이었다. 아마추어 대회였던 세계야구선수권을 위해 프로 입문까지 1년을 미룬 해프닝도 있었다. 최동원과 임호균, 김재박, 심재원 등이 대표적 사례였다.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의 줄다리기 끝에 6명의 선수들을 대표팀으로 끌어들였지만, 숙적 일본과 미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부족함이 많았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 최고의 대학 선수들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어우홍 대표팀 감독의 눈에 든 대학생들이 바로 선동열과 한대화였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풋내기로 여겼던 대학생 두 명이 대형사고를 치게 될지는...

 

위기는 첫 경기부터 찾아왔다. 유럽의 약체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1-2 패배를 당한 것이다. 국내 최고 우완 투수라는 김시진과 최동원이 나왔기에 뼈아픈 결과였다.

 

대회의 향방이 걸린 미국과의 2차전. 대한민국 대표팀은 미국 대표팀이 주목했던 선발 최동원 대신 신예 선동열을 내세웠다. 1회 초 연타를 맞으며 선취점을 내주기는 했지만 3회 말 김재박의 안타 출루에 이어 미국 내야수들의 실책을 곁들이며 동점을 만들어내면서 분위기가 역전되었다.

 

선동열 또한 1회의 실점 이후로는 미국 타선을 철저하게 봉쇄했고 6회 말 조성옥의 2루타에 이어 이해창이 3루수 옆을 빠져나가는 3루타를 뽑아내는 데 성공하며 2-1로 역전에 성공한다.

 

선동열은 2회부터 9회까지 완벽에 가까운 피칭을 선보이며 단 5개의 안타 만을 내주고 승리 투수가 되었다. 미국을 잠재운 선동열의 투구에 반한 어우홍 감독은 이후 주요 경기마다 선동열을 내보내며 우승을 위한 주춧돌을 놓았다.

 

일본과 함께 가장 경계해야 할 팀으로 꼽히며 예나 지금이나 복병인 대만(당시 자유중국)전에서는 9이닝 5피안타 8탈삼진 완봉승을, 캐나다전에서는 2이닝 마무리를 지으며 선동열은 승리 보증 수표로 떠올랐다.

 

그리고 남은 한 경기. 피할 수 없는 일본과 사실상의 결승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이날 경기는 역대 어느 한·일전 보다도 특별했다. 당시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가 터져 반일 감정이 극도로 끌어 올랐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1982년 6월, 일본 문부성이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검정하는 과정에서 ‘침략’을 ‘진출’로 수정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알려지며 한국과 중국에서 거센 반일 시위가 일어났던 것. 그래서 이날 경기에 잠실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함성은 선수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표팀 사정은 좋지 못했다. 직전 경기가 서스펜디드 게임으로까지 흘러갔기에 당일 오전에 5이닝 경기를 치른 상황. 선수단은 단 몇 시간 만을 쉰 채로 경기를 준비해야 했고, 거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하는 한·일전이었던 만큼 ‘지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선수들을 짓눌렀다고 한다.

 

최동원과 임호균은 호주전에서 많은 이닝을 소화해 쓸 수 없었고 김시진은 이미 이탈리아와의 1차전에서 코칭스태프의 신뢰를 상실한 상황. 그래서 어우홍 감독이 선택한 선발 카드는 고려대 투수 선.동.열이었다.

 

이미 대회 기간 동안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최동원을 보러 온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선동열을 보고 간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기에 일본전에서도 충분히 활약해 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경기 초반, 일본이 한국 대표팀 선발투수 선동열을 상대로 2회 초 2점을 먼저 뽑아내는 데 성공하며 불안한 출발을 했고, 한국 타선은 6회 말까지 박노준의 잘 친 타구가 호수비에 잡히는 등 불운이 겹치며 일본 선발투수 스즈키에게 노히트 노런을 당할 정도로 빈타에 허덕였다.

 

그나마 7회 말 한대화가 첫 안타를 때려내며 노히트 행진을 깨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한국의 타선은 무기력했다. 한국에게 남은 아웃 카운트는 단 6개.

 

사진|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우승의 주역인 선동열과 한대화를 소개한 기사. 당시 기사는 고려대 2학년생 선동열을 두둑한 배짱에 강속구가 일품인 투수라고 평가했다 (출처.경향신문)

 

역사는 8회 말에 쓰였다. 선두 타자로 나선 심재원은 중전 안타를 치며 출루에 성공했고, 대타 김정수가 중견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때려내 심재원을 불러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조성옥이 보내기 번트를 성공시키며 2루 주자 김정수가 3루에 안착. 일본은 선발투수 스즈키를 내리고 니시무라를 마운드에 올렸다.

 

이때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1977년 실업야구 7관왕의 주인공’ 김재박. 그러나 김재박은 이번 대표팀에서 대회 내내 부진한 모습을 보여 질타를 받았기에 번트를 시도할 것으로 보였고, 일본 배터리도 이를 인식한 듯 일부러 피치 아웃을 시도한다.

 

그러나 일본 배터리가 일부러 뺀 공을 향해 김재박이 훗날 ‘캥거루 번트’, ‘개구리 번트’로 불리는 기가 막힌 스퀴즈 번트를 대면서 3루 주자 김정수를 불러들여 동점에 성공, 김재박도 1루로 전력 질주하며 세이프 판정을 받으며 여전히 아웃 카운트는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1사 1루에 발 빠른 김재박이 나가 있는 상황에서 대표팀의 중심 타자 이해창이 중전 안타를 때려내는 데 성공하며 1사 1, 3루가 되었고 이어 일본 마운드에는 세키네가 올라왔다.

 

대표팀은 4번 타자 장효조가 나서며 역전을 노렸지만 세키네를 상대로 때린 장효조의 타구는 땅볼이 됐고 3루 주자가 횡사하면서 상황은 2사 1, 2루가 된다.

 

최후의 타석에 들어선 5번 타자 한대화. 동국대 4학년이던 한대화는 일본의 네 번째 투수인 세키네와 풀카운트 싸움을 펼쳤고 6번째 공으로 슬라이더가 제대로 휘지 않고 들어오자 지체 없이 방망이를 돌렸다.

 

21시 34분, 안개 낀 잠실구장의 왼쪽 담장을 향해 날아가던 백구(白球)는 그대로 스탠드에 빨려 들어가서 폴대를 직격하고 튕겨 나왔다. 한국 야구 사상 최고의 홈런으로 꼽히는 역전 쓰리런 홈런이었다. 0-2로 7회까지 끌려가던 대표팀이 단 1이닝 만에 5-2로 뒤집어 낸 것이다.

 

그리고 9회 초, 일본의 마지막 타자 나카야가 선동열의 낮은 공을 퍼올렸고 이 공이 뜬 공으로 처리되며 게임 종료. 세계야구선수권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아시아팀 우승의 업적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해냈다. 프로야구 원년이던 그해, 한국 야구는 두 대학생의 패기로 세계 정상에 설 수 있었다.

 

동영상|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결승 한-일전 하이라이트

 

MVP는 혼자 팀의 3승과 평균자책점 0.31을 기록한 신예 에이스 선동열의 몫이었다. 선동열 본인으로서는 전해 열렸던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에서 받은 MVP보다 훨씬 값진 트로피였고 이 시기부터 선동열은 최동원의 뒤를 이어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 자리를 물려받는다.

 

‘무등산 폭격기’의 1986년, 24승 평균자책점 0.99

선동열이 대학에서 4년을 보내는 동안 프로야구에는 매년 불세출의 투수들이 원맨쇼를 연출했다. 원년이던 1982년에는 세계 신기록이던 22연승을 올린 OB 베어스 박철순과 그해 최고의 좌완 투수였던 삼성 라이온즈 이선희가 있었고, 이듬해에는 현재까지 프로야구 최다승 기록인 30승 투수 삼미 슈퍼스타즈 장명부가 있었다.

 

1984년에는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기록하며 롯데 자이언츠의 돌풍을 이끈 최동원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1985년, 진정한 태양(SUN)이 한반도를 비췄다.

 

신인 선동열에게 프로 첫 해는 지옥과 천당이었다. 1984년 동아일보를 통해 LA 다저스에서 계약 제시를 받았다는 발언을 했고 해외 진출을 위해 프로 입성을 포기하려 했지만, 초특급인 투수를 놓치지 않으려는 해태 타이거즈와 팬들의 성화 그리고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거기다 구단 사정이 좋지 않았던 해태는 최대한 선동열의 계약금을 깎아내려 이런저런 수를 썼고 이에 선동열 측은 최소 3억 원의 계약금을 요구했지만 해태는 난색을 표했다. 이 과정에서 선동열은 군면제에도 실패하고 안 되면 대학원이나 가버리겠다며 대학원 시험을 쳤지만 이것마저 떨어져 버린다.

 

해태는 이제 선동열의 입단 계약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선동열은 한국 화장품 야구단과 계약해 버린다. 당연히 해태 팬들은 난리가 났고 해태 구단 사무실과 선동열의 집에 있는 깨질만한 물건들은 죄다 박살이 나는 분위기 속에서 1985년 새해로 넘어간다.

 

사진|한국 화장품 유니폼을 입은 선동열(왼쪽)과 해태 타이거즈 입단 후 선동열(오른쪽) (출처.나무위키)

 

이 와중에 선동열은 한국 화장품 합숙 훈련에 불참하는 한편, 상무 입단을 선언했다가 번복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이지만 결국 선동열은 한국 화장품 유니폼을 입는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 끝에 프로로 가겠다고 선언한 선동열, 1억 5,000만 원의 계약금을 받고 1985년 3월 25일 해태 입단식을 가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국 화장품 측에서 반발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엄연히 구단에 입단한 선수가 계약 해지도 안된 상황에서 이중계약을 맺은 게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직후 김용수(당시 한일은행 소속)와 민문식(당시 한국전력 소속)도 비슷한 수법으로 프로행이 결정 나는 바람에 아마 야구계의 집단 반발로 번지고 만다.

 

선동열 개인에게는 프로 입단 무효 가처분 소송이 걸렸고, 5월에는 해태가 선동열을 1군에 등록 강행하겠다고 하면서 싸움이 가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5월 21일, KBO 차원에서 선동열을 당분간 출전시키지 않는 대신 선동열에게 걸린 소송을 취하하는 것으로 KBO와 KBA가 극적 합의를 함에 따라 일약 선동열 사건은 큰 일없이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실업야구에 진출한 선수는 실업야구에서 최소 2년을 플레이해야 프로에 진출할 수 있다는 규정이 명문화되었고, 선동열은 전반기 등판 없이 1985시즌 후반기부터 등판하게 된다.

 

결국 선동열의 데뷔는 후반기로 미뤄졌다. 1985년 첫 데뷔전에서 삼성의 재일교포 투수 김일융을 상대로 7이닝 4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했지만 결국 8회에 무너지며 7.2이닝 5실점으로 데뷔 경기를 마쳤다. 당시 해태 김응용 감독은 겸손해지라는 뜻에서 데뷔전을 실점할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밀어 넣었다고 밝혔다.

 

경기 후 선동열은 “좋은 경험을 얻었습니다. 데뷔전에서 승리 투수가 됐더라면 자만심에 들떴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지금의 심정은 패전 투수가 된 것이 앞으로의 프로 생활을 위해 잘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지만 “80% 정도의 힘으로 던졌습니다. 컨디션은 좋지 않았지만 최강 타자들로 구성된 삼성 선수들과 대결하고 나니 프로에서도 내 공이 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하는 패기도 보여주었다.

 

이후 선동열은 후반기 구원승으로만 7승(4패 7세이브)을 거뒀다. 평균자책점은 단 1.70. 향후 한국 프로야구 10년을 뒤흔든 ‘무등산 폭격기’의 시작점이었다.

 

사진|1987년 올스타전에서 만난 한국 야구 최고의 라이벌, 선동열(왼쪽)과 최동원(오른쪽) (출처.KBO)

 

‘입단 파동’으로 생애 한 번 밖에 받을 수 없는 신인왕은 시즌 내내 3루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팀 동료이자 라이벌인 이순철에게 돌아갔지만, 선동열에게는 1986년이 있었다.

 

데뷔 2년 차인 1986년에는 선발로 22경기, 구원으로 17경기를 등판하며 19완투 8완봉 262.2이닝 214탈삼진 24승 6패 6세이브 WAR(대체선수대비 승리기여도) 14.89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으로 한국 프로야구를 초토화시키며 팀의 두 번째 한국시리즈 제패의 일등공신이 됐다.

 

8월부터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대기록을 세웠다. 8월 27일 광주 빙그레 이글스전을 시작으로 이듬해 4월까지 49.1이닝 무실점 행진을 기록한 것이다. , 148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는 동안 단 1실점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무실점 행진은 곧 믿기지 않는 평균자책점으로 이어졌다. 262.2이닝을 던지며 기록한 평균자책점이 0.99. 선동열의 나이 겨우 23살이었다.

 

사진|우타자 가운데에서 바깥쪽으로 휘어지는 선동열의 슬라이더 (출처.MLB PARK)
사진|커브처럼 큰 각을 그리며 떨어지는 선동열의 슬러브 (출처.MLB PARK)
사진|리그 우승을 확정짓는 선동열의 슬러브 (출처.MLB PARK)

 

이듬해인 1987년에는 162이닝 동안 14승 2패 6세이브에 평균자책점 0.89 WAR 9.39를 기록하며 2년 연속 0점대 평균자책점이라는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며 해태의 KBO 사상 첫 2년 연속 우승에 힘을 보탠다.

 

1988년도 역시 16승 5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1.21 WAR 11.79를 기록하면서 에이스로서 전·후기 통합리그로 치러진 단일 시즌 첫 해 우승을 견인했다.

 

특히 1988년은 KBO리그 단일 시즌 WAR로만 봐도 1986년 선동열-1983년 장명부에 이은 3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1986년에 이어 선동열이 선발로서 두 번째로 잘 던졌던 시즌이었다.

 

선동열은 1989년과 1990년 역시 각각 21승 3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1.17 WAR 10.52, 22승 6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1.13 WAR 11.06을 기록해 리그 MVP와 투수 3관왕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6번의 우승 그리고 일본 진출

선동열의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는 멈출 줄 몰랐다. 선동열이 던지면 곧 승리였고, 팀은 우승이었다. 1986년을 시작으로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제패를 이룬 ‘해태 왕조’에는 언제나 선동열이 있었다.

 

물론 시즌 막판에는 어깨에 탈이 나 몇 시즌은 가을야구에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해태에 있던 11년간 포스트시즌에서 20경기에 나와 8승 3패 평균자책점 2.24의 호성적을 거뒀다. 특히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 지은 후 두 손을 번쩍 들고 포수 장채근과 기쁨을 나누는 장면은 지금도 한국시리즈를 회상할 때의 단골 장면이다.

 

사진|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 지은 후 두손을 번쩍 들고 기뻐하는 선동열 (출처.KIA 타이거즈)

 

그러나 1992시즌 이후 선동열은 선수 생활에 중대한 기로를 맞게 된다. 1992년 4월 11일, 선발 등판 예정되어 있던 잠실 OB전을 앞두고 전날 일기예보를 확인 후 우천 취소를 확신한 선동열은 마음 놓고 술을 마셨다.

 

하지만 의외로 경기가 시작할 무렵에는 비가 잦아들어 경기가 강행되었고 선동열은 선발로 등판해 굵어지는 빗방울 아래서 식어가는 어깨로 무리하게 투구를 이어갔다. 결국 이 경기에서 완봉승을 따냈지만 그 결과 선동열은 어깨에 건초염이 생기면서 부상으로 거의 시즌을 접다시피 했다.

 

당시에는 예상도 못했지만 이 경기가 결국 선동열 선수 커리어의 마지막 완봉승이 되었고 결국 선동열의 야구 인생과 해태의 행보에 거대한 전환점을 가져다주게 된다. 선동열의 1992년도 기록은 2승 8세이브 평균자책점 0.28.

 

선동열이 거의 시즌을 거의 공치다시피 한 해태는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롯데의 ‘9회 기적의 행진’ 제물이 되는 이변의 희생자가 되었다.

 

물론 시즌 1위였던 빙그레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롯데의 전력이 매우 강력한 탓도 있었지만 선동열을 제외하고도 10승 투수가 5명(이강철 18승, 김정수 14승, 신동수 13승, 조계현 10승, 문희수 10승) 나왔던 1992년의 해태 전력을 고려하면 매우 아쉬웠던 시즌이었다.

 

선동열은 다행히 건초염이 낫기는 했지만 부작용으로 어깨의 근지구력이 약화되면서 1993년 전업 마무리로 뛰게 된다.

 

사진|전업 마무리로 전환한 뒤에도 한국 프로야구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선동열 (출처.KIA 타이거즈)

 

1993년은 선동열 야구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하나는 선발에서 마무리로 전향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 야구 최고의 투·타 콤비를 이룬 고교 후배 이종범과 짝을 이뤘다는 것이다.

 

선동열은 원체 선발과 구원을 자주 오갔던 탓인지 구원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1993년에는 선발투수와 맞먹는 126.1이닝을 던져 31세이브를, 1995년에는 109.1이닝을 던져 33세이브를 기록하며 2번의 구원왕에 오른다.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을 풀면 상대팀 더그아웃이 패배를 받아들인다는 일화는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해태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8년간 6번을 우승하는 동안 선동열은 5번은 선발로, 1번은 마무리로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선동열은 팀을 우승시킬 줄 아는 투수였다.

 

이렇듯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는 동안 압도적인 활약을 펼친 선동열은, KBO리그 기록으로만 보면 그에 범접할 투수는 사실상 찾아볼 수 없으며 현역 시절 직접적인 맞대결에서도 선수 생활 초반 나이 차가 좀 있던 최동원을 제외하면 라이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선수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사진|KBO리그 최고의 라이벌전이었던 《퍼펙트 게임》의 주인공 최동원(왼쪽)과 선동열(오른쪽) (출처.KBO)

 

매년 범접할 수 없는 성적을 기록하는 와중에서도 선동열이 선발과 마무리에서 각각 정점을 찍은 시즌은 1986년과 1993년으로, 물론 1986년과 1993년이 역대 최고의 투고타저 시즌으로 기록되고 있기는 하지만 KBO리그 역사상 이 시즌에 버금가는 기록을 올린 선수는 찾기가 힘들 정도다.

 

사진|강력한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낮은 투구폼으로 '무등산 폭격기'라는 별명을 얻었던 선동열 (출처.KIA 타이거즈)

 

마무리 전향 후 3년. 선동열은 선수로서 기로에 섰다. 한국에 남을 것이냐, 해외로 나갈 것이냐. 본인은 해외 진출이 꿈이었지만 구단은 어떻게 해서라도 선동열을 막아야 했다.

 

KBO리그는 당시 FA(자유계약선수) 제도가 없어서 아무리 팀에 공헌을 많이 해도 구단이 풀어주지 않으면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1995시즌 후 11년간 6회 우승에 기여한 선동열은 해태 구단에 해외 진출을 원한다는 뜻을 강하게 피력했고 이에 해태는 해외 진출을 반대하다가 은퇴 불사의 전략을 펼치면서 강경하게 나오는 선동열과 국민들 대다수가 찬성하는 여론과 맞물려 1년만 더 뛰고 1996년 우승한 뒤 떠나라고 말했다.

 

미·일(美·日) 프로야구 팀들의 러브콜 끝에 선동열은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로 향한다. 몬스터 시즌이던 1986년 후 정확히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사족으로, 이때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시 선동열을 노리고 해태에 접근했다. 이에 해태 이상국 단장은 긍정적으로 보고 요미우리와 거의 계약성사 직전까지 갔지만 주니치 구단 측에서 자매결연 관계인 LG 트윈스 구본무 구단주에게 협조 요청을 했고 구본무 구단주와 특수 관계였던 해태 박건배 회장이 주니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구단주의 의사를 거슬러 요미우리 임대를 추진했던 사장과 단장이 한꺼번에 옷을 벗는 후폭풍이 일었다).

 

주니치에 입단하면서 달게 된 등번호는 20번. 주니치의 투수 에이스들(스기시타 시게루-곤도 히로시-호시노 센이치-고마쓰 다쓰오)이 차례로 달았던 등번호이다. 그만큼 진출 당시 일본에서도 선동열에 대해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진출 첫 해였던 1996년은 선동열 야구 인생에서 최악의 시즌이었다. 태평양처럼 넓었던 국내 프로야구보다 훨씬 좁은 일본의 스트라이크 존 적응 문제와 더 높은 레벨의 일본 타자들을 상대하면서 많은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진|일본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의 선동열 모습 (출처.MLB PARK)

 

한국 타자들이 헛스윙하기 급급하던 공을 일본 타자들은 뛰어난 선구안으로 볼넷을 얻어내거나 탁월한 컨택 능력을 바탕으로 기어코 안타를 만들어내니 당시 선동열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선동열은 1996시즌 도중 2군을 전전하기까지 하며 패전 처리로 주로 뛰면서 평균자책점 5.50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고, 바로 전 시즌 한국에서의 평균자책점보다 무려 5점이나 상승했을 정도로 부진을 겪게 된다.

 

다만, 클래식 스탯의 경우 의심할 여지없는 최악의 성적이나 세이버 스탯을 보면 상위 리그로의 첫 진출 시즌 치고는 그렇게 나쁜 시즌은 아니었다.

 

일본 진출 첫 해인 1996년 선동열의 FIP(수비무관 평균자책점)는 2.62로, 평균자책점에 비해 상당히 괜찮았으며 K/9(9이닝당 탈삼진 개수) 역시 11.17개를 기록하며 구위 역시 일본에서 통하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BABIP(인플레이 타구의 안타 비율)이 무려 0.382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세이버 메트릭스의 관점으로 평가하면 운이 따라주지 못한 시즌이었다고 볼 수 있다(놀랍게도 1996년 선동열의 세이버 스탯은 2015년 한신 타이거스에서 41세이브 7홀드 평균자책점 2.73을 기록한 오승환의 세이버 스탯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부분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서 선동열이 일본 데뷔 첫 해 부진한 이유 역시 살펴볼 수 있다. 1996년이 주니치 커리어에서 K/9가 가장 높았던 시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패스트볼의 구위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즉 항간에서 얘기하는 ‘해태 시절보다 노쇠화로 인해 구위가 떨어져서 성적이 좋지 못했다’는 말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정작 문제는 KBO리그에서는 상대가 없었던 주자 견제 능력과 제구가 일본에서는 매우 떨어지는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1996년 BB/9(9이닝당 볼넷 개수)는 3.6개를 조금 넘는 수준으로 주니치 시절 중 가장 좋지 않은 기록을 남겼다.

 

국내 마지막 커리어인 1995년 BB/9이 1.15개였으니 1년 만에 BB/9가 3배나 폭등한 것이다. 거기에 견제 능력이 확실히 좋지 못해 타자가 1루에 나가기만 하면 그린 라이트였고 이는 0.1이닝 7실점의 악몽을 남긴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타선에게 유독 약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 구위는 좋아서 삼진은 잘 잡아내지만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면 썩 좋지 않은 제구로 인해 볼넷으로 타자가 출루하게 되고 견제 능력이 떨어지는 탓에 주자가 손쉽게 도루에 성공. 이로 인한 불안한 경기 운영으로 주자를 쌓다가 장타를 맞고 대량 실점하는 패턴을 보였다.

 

KBO리그에서 선동렬은 상대팀 타선을 초토화시키며 절대자로 군림했지만 일본에서는 구위는 괜찮지만 제구도 경기 운영 능력도 부족한 2군을 들락거리는 패전 처리조일뿐이었다. 일본에서의 첫 시즌, 이렇게 선동열은 적응 실패로 단 5승(3패) 3세이브 만을 거두는 데 그쳤다.

 

사진|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외국인 타자였던 셰인 맥이 선동렬과의 대결 중 슬라이더를 잡아당겨 홈런을 친 경기 후 "슬라이더밖에 없네. 슬라이더만 노려"라는 멘트를 날린 적도 있었다 (출처.동아일보)

 

굴욕을 맛본 1996년 시즌이 끝나고 겨울이 되자 선동열은 마음을 다잡고 투수코치에게 직접 개인 훈련을 부탁하며 대대적인 수정에 들어간다. 이때 어찌나 독하게 훈련했던지 김응용 감독이 “한국에서 저렇게 훈련했으면 30승은 했을 거다” 말을 들을 정도였다.

 

이후 1997년에는 1승 1패 38세이브 평균자책점 1.28 WHIP 0.76 WAR 4.5, 1998년에는 3승 무패 29세이브 평균자책점 1.48 WHIP 0.86 WAR 2.3을 기록하며 일본 리그 최고 수준의 마무리 투수로 등극했다.

 

투구 스타일은 KBO리그 시절 오승환과 비슷하게 주무기는 70% 이상 던지는 패스트볼이었고 여기에 슬라이더를 가미했다. 사실상 KBO리그가 톱클래스 선수들의 일본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전락한 시발점은 선동열의 1997년 이후의 활약이었다.

 

사실 선동열이 정말 대단한 점은 성적도 성적이지만 자존심을 내려놓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실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는 점이다. 심리적 압박과 적응의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냉정하게 돌아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진|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선동열의 152km/h 포심 패스트볼 (출처.미친야구)
사진|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선동열의 152km/h 포심 패스트볼 (출처.미친야구)
사진|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선동열의 147km/h 투심 패스트볼 (출처.미친야구)
사진|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선동열의 날카롭게 떨어지는 슬라이더 (출처.미친야구)

 

이종범, 이상훈 등 후배들과 함께 해 힘도 났다. 적응이 끝난 국보급 투수는 1999년까지 일본 프로야구 4시즌 통산 98세이브를 수확했고 이 기록은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활약했던 임창용이 깨기 전까지는 한국인 최다 세이브 기록이었다.

 

사진|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함께 선수 생활을 한 선동열(왼쪽)과 이종범(오른쪽) (출처.중앙일보)

 

그러나 일본에서 4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선수 생활을 한 선동열이 얻은 가장 값진 것은 단순한 세이브 숫자가 아니라, ‘나고야의 태양’, ‘역대 최고 주일 외교관’이라는 수식어였다.

 

‘나고야의 태양’ 선동열. 선동열의 활약 덕분에 팀은 1999년 우승을 차지했다

선동열의 마지막 시즌이던 1999년 성적은 1승 2패 28세이브 평균자책점 2.61을 기록하며 표면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1997, 1998년의 성적과 비교하면 확연히 떨어진 성적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39경기라는 적지 않은 경기에 등판하였음에도 소화 이닝이 31이닝으로 평균 1이닝도 안될 정도로 떨어졌다. 한 마디로 마무리가 불안해서 9회 시작하자마자 출격시키지를 못하고 아웃카운트 1, 2개 남겨놓고 투입하는 일이 꽤 있었다는 소리.

 

WHIP으로 봐도 1997년과 1998년 각각 0.76, 0.86을 기록한 반면 1999년은 1.32로 치솟으며 확연히 불안해졌다는 걸 성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주니치의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역시 전년에 비해 불안한 모습을 보인 사사키 가즈히로와 함께 “선동열과 사사키 모두 올해는 구위가 아닌 얼굴로 마무리를 하고있다”고 발언을 했을 정도.

 

다만 이 발언은 선수의 능력을 폄하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두 투수 모두 전성기를 지난 모습이지만 그 투수의 이름값만으로도 타자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언급한 것이었다.

 

동영상|선동열의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활약상 하이라이트

 

밀레니엄 시대를 눈앞에 두고 선동열은 그렇게 마운드를 떠났다. 선동열이 성인 무대로 나선 1981년부터 1999년까지, 스무 해 동안 선동열은 위대한 투구를 야구 팬들에게 선보였다.

 

은퇴 경기는 2000년 3월 9일 나고야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범경기 도중 열리게 되고 요미우리의 대표 타자였던 마쓰이 히데키와 상대하게 된다.

 

타석에 들어선 마쓰이는 선동열을 상대로 안타를 때리고 서로 웃으면서 포옹했다. 참고로 마쓰이는 선동열 상대로 통산 15타수 5안타(모두 단타) 무볼넷이며 타율은 0.333로 강한 편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 마쓰이에게 선동열의 은퇴 경기에서 어째서 안타를 쳤는가에 대한 질문이 돌아왔다. 이에 마쓰이는 “현역을 은퇴하는 선수에 대한 내가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예의이다. 오히려 일부러 치지 않았으면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사진|선동열의 현역 은퇴를 보도하는 KBS 뉴스 화면 (출처.KBS)

 

결국 1999년 11월 22일, 선동열은 은퇴를 선언하며 대한민국의 국보급 투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이 단순한 조합으로 선동열은 한·일 프로 생활을 통틀어 1,844이닝을 던졌으며 156번의 승리와 230번의 세이브를 따냈다.

 

평균자책점 1위는 무려 8번을 하며 통산 평균자책점 1.20 통산 WHIP도 0.80을 기록했다. 게다가 정규이닝을 소화하면서도 0점대 평균자책점 시즌을 3번이나 달성했다.

 

기록에서 나타나듯이 전성기 선동열은 그야말로 완전체를 넘어 절대자에 가까웠다. 배짱, 센스 등등 투수로써 갖춰야 할 모든 자질이 다 갖추어져 있었고 독보적으로 완벽했다.

 

평균 구속도 142-145km/h에 형성되었으며 최고 구속이 150km/h 대에 달할 정도로 매우 빨랐고 역대 최고로 평가받는 뛰어난 슬라이더를 자랑하면서 거기에 리그 평균 이상의 슬러브도 섞어 타자들을 요리했다.

 

이외에도 선동열은 투수 각 부문에서 최다, 최고 기록을 가장 많이 보유한 선수로 남아있다. 또한 선동열은 한국 선수도 세계 무대에서 충분히, 아니 ‘강력하게’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마운드에서 왕조를 이룬 사나이, 야구를 통해 국보로 불린 사나이, 선동열은 곧 한국 야구다.

 

표|선동열의 통산 투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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